Joan Kim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추리>,백기영_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하여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추리> 백기영(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지독히도 무더운 날이다.
에어컨 실외기가 뜨거운 열기를 내며 냉기로 맞서주는 덕에 나는 오늘도 하루를 버티고 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기술하는 이 감각적 상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
이 더위도 주말이 지나면 사그라질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순간을 감각하고 있는 현실과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시간은 ‘레테의 강’을 따라 망각된다.
오늘 하루 바깥에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나는 모두 다 떠올릴 수 없다.
어쩌면 나는 구체적으로 이것들을 사유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망각의 강에 빠져드는 파편적인 기억들을 주워 담기에 나의 텍스트와 언어는 허약하고 무기력하다. 김연정은 사라지는 것들을 마주하고 섰다.
그녀는 열 명의 사람이다. 잠자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꽃) 만드는 사람 먹는 사람 쾌락의 사람 고독한 사람 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그녀(들)’다. 그들은 어딘가에 있었으나 사라지고 없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등장하는 열 명의 사람들은 외딴 섬에서 하나씩 사라졌는데, 여기 열 명의 사람들은 하나에서 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 이들이 등장한 장소는 익산시 평화동, 한국농촌공사 소유의 수리조합 건물(1930년 건축)을 리모델링해서 2011년 만들어진 익산창작센터가 있는 지역이다.
일제의 수탈에 기여했던 이 건물의 역사를 비교해 본다면, 이 마을의 이름 ‘평화동’은 역설적이다.
어쩌면, 경제적 부흥과 삶의 활기가 사라지고 고요한 마을로 돌아왔으니 말 그대로 ‘평화동’인지도 모르겠다. 일제의 수탈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이 마을은 여전히 수탈된 상태다.
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욕망의 이빨이 이들을 물어뜯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들을 그 시간에 묶어 놓은 자들은 누구일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가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 마을에 열 명의 여자들이 나타났다.
7년을 잠만 자던 여자는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담벼락 앞에 담요를 깔고 길바닥에 누웠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없는 상황임에도 길에 누운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그녀는 여기 저기 마을을 옮겨 다니며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잠을 잔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방황하는 여자는 거리를 떠돈다. 시장과 골목길, 폐허가 된 공터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무심한 풍경뿐이다. 생각하는 여자는 여기 저기 텅 빈 도시에 걸터앉아 있거나 구멍 뚫린 옥상 난간이나 햇살이 쏟아지는 여인숙 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꽃)을 만드는 여자는 초록색 원피스 차림에 담벼락에 칠해진 알록달록한 꽃 그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려한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녀는 꽃과 한 덩어리를 이룬다. 먹는 여자는 동네 식당을 전전하며 무언가를 먹고 있다. 중국집이나 불고기 정육점 등을 떠돌며 주린 배를 채운다. 쾌락의 여자는 폐허가 되어 버린 이 마을의 술집과 유흥업소를 배회한다. 맥주를 병째 들고 마시다 취해버린 여자는 가맥집 길바닥에서 잠들어 버렸다. 낡은 집 앞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고독한 여자는 골목길 가운데 앉아서 울고 있는 여자와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비는 기도하는 여자로 이행하기 전의 단계를 서성이고 있다. 반면, 청소하는 여자가 나타나 여기저기를 쓸고 닦지만 좀체 마을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열 명의 여자들은 각자의 성격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열 명에게 붙여진 이름처럼 그들은 자신의 캐릭터에 충실하게 연기한다. 열 명의 여자는 운명을 점치는 카드에 등장하는 캐릭터이거나 작가가 변신 가능한 아바타와 같이 다중적 인격을 반영한다.
그녀들은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들은 ‘귀신’이거나 ‘광인’을 닮았다. 그녀들은 횡설수설하거나 기이한 짓거리를 한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두려워한다.
나는 그녀들의 사진을 보고 어린 시절 강원도 산골 마을에 가끔씩 나타났던 여성 노숙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녀의 행색은 너무나 기괴해서 두려움과 연민을 동시에 자아냈다. 그녀가 마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의 그녀는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일찍이 이브 클라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민했다. 그가 1958년 이리스(Iris Clert) 갤러리에서 했던 개인전은 전시장 내부를 텅 비워 놓고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고 그것을 ‘공허(vide)’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1960년 11월 27일 발간한 하루짜리 신문에 등장하는 <허공(vide) 속으로 점프(Le saut dans le vide)>라는 작품에서는 골목길의 집 2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이 두 작업은 비가시적인 ‘허공’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여기서 빈 공간을 감지하는 것이나 허공 속으로 몸을 던지는 행위는 육체적인 것이었다. 늘 빈 공간과 마주하고 있는 신체는 허공을 향해 뛰어드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클라인이 빈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체를 활용했다면, 김연정은 사라져가는 마을의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활용했다. 김연정의 작업에 등장하는 열 명의 여자들은 폐허가 되어 사라져가는 공간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이브 클라인이 허공 속으로 점프하는 장면을 정교한 사진 몽타주 기법으로 연출한 것처럼, 그녀의 사진들도 연출되었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시놉시스를 구성하는 장면들의 스틸 컷처럼 보인다. 그녀는 여러 장소에서 두 개의 사진을 찍었다. 하나는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사라지고 그녀의 몸을 찍어낸 신체 탁본화가 붙어있는 사진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신체적 증거물이다. 클라인의 작업이 물리적인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김연정의 공간은 심리적 서사적 공간에 접촉하고 있다. 두 작업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공간과 마주하고 있는 작가 실존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두 공간은 신체를 통해서 매개되고 있다. 김연정은 영화를 전공했다.
전주국제 영화제나, 네덜란드 로테르담 영화제, 터어키 앙카라 국제영화제 같은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영화로부터 출발했지만, 사진, 퍼포먼스, 설치, 페인팅에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예술과 삶이 통합된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을 구체적으로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예술가 자신에게서 나온 하나다.
예술가의 ‘태도’는 모든 형식을 통합한다.
전시장에서 그녀의 사진들과 영상 그리고 열 개의 가면과 여러 장소에 붙어 있었던 그녀의 신체 탁본은 24시간을 상징하는 원형 설치물 주변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전시장에서 선보인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이 마을에서 만나 하룻밤 풋사랑(?)에 빠진 남녀의 일과를 보여주었다. 레테의 강물에서 잊히지 않는 가장 강렬한 것이 ‘남녀가 나눈 사랑의 기억’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 시작한 삶의 여정에서 김연정은 어느새 몸으로 관통하는 예술로 뛰어들었다. 몸은 춤이 되고 그림이 되고 시가 되며 사진도 되고 영화도 된다. 몸을 매체로 삼은 예술은 무한을 향해서 몸부림친다. 그녀의 몸부림은 인간의 고독과 향수, 불안, 물질적인 욕망, 갈등, 운명에 대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_2016 백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