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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Joan Kim

에비게일 차일드 Abigail Child : 무거움을 감아 올리는 장치 없는 이주의 우산, 김연정


에비게일 차일드 Abigail Child

: 무거움을 감아 올리는 장치 없는 이주의 우산

‘나는 표면 Surface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모서리 Corner에서 시작한다.

나는 더 깊이 내려 갈수록, 표면에 다다른다. ’ (에비게일 차일드)

에비게일 차일드의 이 “표면”에 관한 언급은 저를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 ‘표면 소음 Surface Noise’의 매혹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운동과 감각, 사건과 사람의 유연한 흐름의 표면들은 한편, 내부의 복잡다단한 무게중심들을 고도로 응축된 밀도로 끌고 다니는 축이기도 합니다. 표면에서 시작하여 모서리로 이동하고, 그 모서리와 인접한 두 세계, 혹은 다각의 면들을 돌아가는 영화는 다시 어느 한 모서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또 그 모서리와 인접한 두 면, 혹은 다각의 면을 돌아가고, 그 다면들을 돌아가다 보면 처음의 그 모서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것처럼, 그 무게중심의 축들은 순간 순간 파편화되고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올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의 회고전으로 마련된 에비게일 차일드의 작품들은 그 명민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빠른 진동들로 인해, 마치 물의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빛들처럼 그 표면에 시선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표면이 아니라 모서리에서 시작하며, 더 깊이 내려갈수록 표면에 다다른다’는 말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은데, 이는, 그녀가 또 다른 곳에서 언급한 ‘영화에서의 파편화는 단순히 “탈 중심화”나 중심적 완전성의 결여가 아니라 대안적인 구성이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임시적 중심들’이라고 했던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임시적인 중심들’이라는 말은, 올해 5회를 맞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이 국내에 실험영화의 장을 만들고자 했던 힘겨운 출발에서 소개의 자리를 만드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남겨야 했던 점들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는 새로운 노력으로써의 이 카탈로그의 출판에 많은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이라는 것이 항상 부족한 점이 있듯이 이 작은 책도 에비게일 차일드의 작품들을 돌아보는 데 충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또 시작이라는 것이 항상 열정적이듯이 한 실험영화 작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에 대한 관심과 그 관심들을 나누고 싶은 열의가 주위 여러분들의 소중한 도움으로 함께 담겼습니다.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와 함께 하는 에비게일 차일드는 작업에서의 새로운 성취뿐 아니라 스스로 명석한 연구가이자 시인이었기에 이 카탈로그를 통해 그녀의 작품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직접 쓴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들, 문화에 대한 혜안들을 텍스트로 접하는 것은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에비게일 차일드의 글들이 산문에서도 시적인 어구들과 함축적인 표현이 많아 번역으로 그 다층적인 의미들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사운드와 이미지의 몽타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관된 분절적인 작업노트들은 번역으로 전하기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원문으로 개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에 관심 있는 분들이 더욱 생생한 그녀의 생각들을 느끼고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에비게일 차일드에 관한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하버드 대에서 역사학, 예일 대에서 사진과 영화를 공부한 에비게일 차일드는 70년대 좌파 다큐멘타리 작가로 영화를 시작했고 40여년 동안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70년대 그녀는 ‘게임 Game(1972)’, ‘시간 사이에서 Between Times(1975)’ 등 독립 다큐멘타리 7편을 만들지만, 이후 다큐멘타리 구조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그녀의 대표작중 하나인 ‘이것이 당신이 태어난 이유입니까 Is This What You Were Born For?’시리즈의 실험 작품들을 만들면서 파운드 푸티지 작업과 이미지/사운드 몽타쥬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합니다.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자장 속에서 작업과 동시에 열정적인 연구들로 동시대의 영화운동들에 관한 뛰어난 글들을 남기기도 한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영웅들이었던 실험영화의 아버지 스탠브랙키지 Stan Brakhage, 홀리스 프램튼 Hollis Frampton, 피터 쿠벨카 Peter Kubelka,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렌 라이Len Lye 등에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 작업에 대한 통찰적인 시선 후에, 전통이 세워놓은 개인적 비전의 투명성에 관한 로맨틱한 신화들로부터 벗어나며, ‘아들이 아니기에 아버지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사적인 고백적 선언으로 구체적인 개인성과 사회적 맥락들을 다시 세우는 급진적인 작업들을 이어갑니다. 브루스 코너에서 반어와 모순의 변형을, 프램튼으로부터 영화역사에 관한 개인적 현대성의 반어를, 쿠벨카에서 프레임 단위의 사운드 이미지에 대한병렬을, 렌 라이에서 리듬을, 존 케이지에서 변주를, 말라르메에서 언어와 시로써의 사운드에 관한 영향을 배웠다고 하는 그녀는 또 한 명의 영웅이었던 스탠 브랙키지의 연구를 통해, 그가 눈의재현적 관습을 깼지만 여전히 눈의 메타포에 기대며 투명성의 신화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고, 영화 언어의 대체성과 부서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반어주의자로써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덧없는 미와 생성되지 않는 의미들의 유머의 꽃들로 반짝이는 그녀의 사운드와 이미지의 진동들을 영화사가들은 브랙키지와 프램튼의 시적 전통의 위기에서 탄생한 작품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에비게일 차일드 본인은 그녀의 글 <‘서문들’을 위한 서문>에서, ‘의미들은 접점만을 갖거나, 예시적인 채로 고정되지 않은 관계들 속에 수직적, 수평적, 순환적으로 이어져 배치된다. 사운드가 페이지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라고 ‘표면 소음’의 구조적 축조와도 관련된 사운드와 이미지의 몽타쥬에 대한 공간적 상상의 작업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출발한다는 모서리를 다른 시공간과의 접점으로 형성하며, 그녀 작품들의 주된 특징인 ‘전조적인’ 혹은 ‘예감’의 기운으로 가득 찬 감각들을 ‘모서리의 시간성’으로 재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그 전조의 기운들은 흘러가는 이미지의 확실한 실재들로도 어떤 의미들과 가능성을 만들지 않으며, 한 측면에서는 현실에서 나왔으나 그 몽타쥬들을 의미화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현실에 대한 전조들로 모서리에 위치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의미들이 의미로 작용하지 않고 운동으로 작동하게 끔 하는 그녀의 몽타쥬를 통한 의미화의 뒤집힘 들은 그녀가 언급한 ‘인접성’과 ‘굴곡’이라는 공간적 전략으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것들을 조화시키지 않고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러다 또, 그들이 여전히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축조의 한 모서리, 연결고리들의 모서리들이 된다…나는‘인접성 (adjacencies)’ 대신에 ‘굴곡/휨 (bending)’, 시간의 모서리를 창조하는 등 어긋난 요소들을 가지고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접성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그녀의 생각들이 더욱 강력하게 빛을 발하는 작품은, 90년대 다시 공공적 장소에 대한 다큐멘타리적인 탐사로 돌아간 작품 ‘B/Side (1996)’와 ‘Below The New; A Russian Chronicle (1999)’ 에서 일 것이다. 특히 ‘B/side’는 뉴욕의 월 스트리트와 인접한 거대한 노숙 야영지를 촬영한 작품인데, 어떤 실험 다큐멘타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논의의 틈을 열어 놓습니다.

‘예술의 생산은 단순히 이러한 경험의 소비인가? “위기”에서 개인이라는 뼈대는 없다. 당신도 그 일원이며, 오직 종만이 존재한다. 당신도 그 종을 파괴하는 일원.’

이 날카로운 언급은 파편화된 멜로 드라마와 불길한 암시조의 캐릭터들로 무성영화의 현기증 나는 순간을 패러디한, 차일드의 <이것이 당신이 태어난 이유입니까?> 시리즈 중의 ‘위기 PERILS’라는 작품의 제목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러한 해체적 내러티브 장치에서 더 나아가, 이는 다큐멘타리의 생산 자체에 관한 신랄한 자기 숙고와 더불어 영화와 현실 사이의 더욱 역동적인 출구들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허구와 실제의 경계에서, 개인이라는 뼈대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전조들을 넘나들게 하는 순간들은 그 내밀한 폭발성으로 영화 안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입니다. 영화만큼이나 많은 영감을 주는 그녀의 사회적 시선과 영화 창작의 숙고들은 <설치된 프레임과 사회망>, <목격하기: B/side를 위한 노트>들에서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리얼리티와의 조우’가 아니라 ‘우연한 만남들 속의 리얼리티, 즉 조우: 리얼리티’ 정도로 축약될 수 있는 다큐멘타리의 더욱 강력한 위치 짓기일 것입니다.

200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대표적인 재활동성의 이런 몽타쥬와 더불어 또 한편의 그녀의 관심축이었던 ‘계급과 젠더’의 현대적 이슈들을 계속적으로 탐사하는데, ‘어두워 어두워 DARK DARK (2001)’, ‘표면 소음 SURFACE NOISE (2000)’, ‘케이크와 스테이크 CAKE + STEAK(2004)’는 멀티 스크린과 설치 작업의 맥락 안에서 기이한 드라마의 탐사를 지속하는 작품들입니다. 이렇듯, 파운드 푸티지와 사운드, 이미지의 몽타쥬 작업들을 급진적인 가능성으로 재 탄생시켜 온 그녀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미학적이기보다 윤리적인 것이기에 시적 언어의 정치성에 주목한다는 관심과 할리우드라는 이미지의 공장에서 전 공장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것, 불복종의 내레이션을 만드는 것으로 다큐멘타리와 내러티브의 형식적 장치에 관한 사유를 펼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수직적 몽타쥬의 작업들을 수평적으로 다원화되고 개입적인 설치로 전환하는 작업도 하고 있는데, 이런 그녀의 작품들은 뉴욕현대미술관 MOMA, 파리 퐁피투 센터 등에 영구 소장되어있습니다. 2007년 가을 하버드대학 필름 아카이브와 샌프란시스코의 예르바 부에나센터 Yerba Buena Center 공동으로 앤솔로지 필름아카이브 Anthology Film Archive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고, 작가이자 시인으로 최근작 “움직임이라 불리는 것: 영화의 비판적 시학 This is called moving; A critical poetics of film (2007)”을 비롯 여러 권의 영화 비평서 및 시집을 출간 하였습니다.

이 카탈로그에서는 에비게일 차일드 본인의 글뿐만 아니라, 간단하게 살펴 본 그녀의 활동과 작품들에 관한 더 자세한 배경을 제공하는 논의들이 담겨있습니다.

모린 튜림 Maureen Turim의 <에비게일 차일드 영화의 사운드, 간극 그리고 반짝이는 이미지들>은 페미니즘 영화나 순수 예술의 맥락들과의 접점에 대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현대의 중요 실험 다큐멘타리 작가인 샹탈 액커먼이나 순수예술에서의 신디 셔먼, 한나 회흐 등 동시대적인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어떤 배경들을 공유하고 차이화하고 있는 지에 관한 흥미로운 접근은 영화에서 뿐 아니라, 다각적인 측면에서 페미니즘 예술에 관한 관심을 이어온 작가의 축적에서 나올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들 일 것입니다. 저자는 에비게일 차일드의 거의 전 작품에 걸쳐 그들의 풍부한 맥락들을 탐구하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이슈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미학과 형식, 철학에 관해서도 성실한 독해를 제공합니다.

아담스 시트니 P.Adams Sitney 의 <에비게일 차일드: 텍스트적 자존성>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전통 속에서 에비게일 차일드와 영향 관계에 있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풍성하게 논하는 글인데, 그녀가 그러한 전통 속에서 이미지, 사운드의 작업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받은 영향들을 통해 그 작업의 맥락들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특히 <이것이 당신이 태어난 이유입니까?> 시리즈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투영에서 풋티지 이론으로>라는 김곡의 글은 파운드 푸티지 작업이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관해 무한한 애정으로 접근하는 글로써, 에비게일 차일드의 작품에 대한 분석들은 아니지만, 그녀가 파운드 푸티지 작업에서 구현한 철학과 작업 노트에 대한 풍부한 재해석과 새로운 영감들을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 에비게일 차일드와 더불어 다른 작가들이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통해 얻어낸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 관한 고찰, 파운드 푸티지 작업 자체가 갖는 미학적, 철학적 의미에 관해 법, 철학, 작가들의 작업노트, 인터뷰 등을 횡단하며 그들의 미학적, 철학적 의미에 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는 글입니다.

에비게일 차일드 본인이 쓴 <노이즈를 넘어선 손의 신호들, 거리>, <시선과 사운드/영화와 언어의 상호관계>는 그녀가 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영향 받은 작가와 작품들에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글들입니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작업을 왕성하게 하던 젊은 시절 깊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던 마이클 스노우와 켄 제이콥스의 작업을 보며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 언어에 관한 구조들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고 있는데, 영화 기계장치와 손으로 언급되는 재창조성에 관한 초기 그녀의 숙고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좋은 작품들을 보고 영감의 노트를 기록하듯이, 친숙한 느낌들을 전해주는 이 에세이적인 노트에서도 그 작가들의 작품과 관련된 이슈를 탐색하는 데 있어 날카로운 비범함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시인으로써 함축적 언어와 철학적 발화를 생각하며, 언어가 영화에서 사운드화될 때의 체현의 고민들도 함께 담고 있는데, 사운드와 언어를 오갈 수 있는 사유의 고민들이 흥미를 주는 글들입니다.

또 <설치된 프레임과 사회망>, <목격하기: B/side를 위한 노트>에서는 사회, 문화적인 이슈와 관련된 시선과 영화 만들기 사이의 고리들인, 그녀의 급진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짧은 글에서도 전해져 오는 놀라운 통찰들은 다큐멘타리적인 접근에서 그녀가 제작하였던 작품들을 다시 깊이 있게 돌아볼 수 있게 하는 틀을 제공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와 영화 창조의 접점에 대한 많은 영감을 제공합니다. 이와 연관되어, 제프리 스칼러 Jeffery Skoller의 < B/side-가상(들): 역사적 순간성(들) 2>도 현재의 영화이론이나 문화이론의 뜨거운 이슈들과 함께 에비게일 차일드의 작품에 대한 분석과 배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사유들이 그녀의 작품에 대한 접근을 다각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에비게일 차일드가 만든 근작에 대한 부분이 아쉽게 남아, ‘거울 세상 MIRROR WORLD(2006)’ 과 “교외 삼부작” 프로그램에 있는 세 작품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하려고 합니다. ‘거울 세상’은 고전 발리우드영화 ‘AAN’을 계급과 성차에 관해 코믹하고 해체적인 연구들로 재조합한 작품으로, 차일드가 쓴 시를 중심으로 ‘시의 텍스트’가 영화구조의 중심을 형성한 작품인데, 파운드 푸티지의 이미지와 차일드의 시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많은 간극을 가지며, 의도된 화면분할, 조정, 메타 텍스트에 있는 언어들이 가장 장치적으로 충돌합니다.

‘내 얼굴로부터 당신의 시선을 거두게 하고 싶어요.

당신의 욕망으로 내 구름 안에 오세요. 단지 시선이 아니라?’

‘이것이 나의 패배이다. 이것이 나의 정복이다.

이 철학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누구의 삶에서도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는 말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흥얼거림은 왕좌에 갇혀 있다.’

영화에서 자막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이러한 시들은, 끊임없는 시선과 응시에 대한 질문과 함께 그녀가 계속적으로 제기해 온 권력의 문제를 내러티브적인 전복, 성차의 미묘한 양가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외 삼부작” 프로그램에 있는 ‘케이크와 스테이크 Cake & Stake’ 는 미국 교외의 일상적 삶 안에 내재해 있는, ‘달콤함과 육식성’을 삶의 지속을 위한 갈구로 드러내는데, 교외라는 주변적 삶을 둘러싸고 있는 허약한 이데올로기들, 종교와 선, 부와 희망들, 사회적인 이상, 합법 안에 있는 입구와 출구 등 미국 교외 핵가족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재 풍경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프로그램에 있는 그녀의 가장 최근작 ‘써프 앤 터프 SURF and TURF (2008)’ 도 ‘케이크와 스테이크’에서 다루었던 대조들을 비슷하게 가져오고 있는 작품으로, ‘파도와 잔디, 부서지는 것과 머무는 것’으로, 지중해와 미국 서부 해안가의 파라다이스적 이상이 투영된 미국 동부 뉴저지 해안가를 디아스포라적 공간의 귀환으로 포착합니다.

1930년대 바바리아의 한 가족에 관한 파운드 푸티지로 허구적인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2004년도 작품인 ‘미래는 당신 뒤에 있다 THE FUTURE IS BEHIND YOU’가 “교외삼부작”에 속해있는 것은 조금 의외로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작품이 “교외삼부작”의 맥락에 놓임으로써 이주와 관련된 더욱 강력한 미국의 역사를 구성합니다. 어쩌면 ‘케이크와 스테이크’ 의 집단적, 감정적 전사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교외 삼부작이라 이름 붙여진 카테고리에서 독특하게 파운드 푸티지를 통해 역사를 언급하는 작품이며 그래서 ‘케이크와 스테이크’, ‘써프 앤 터프’ 의 교외적 일상에 대한 고리와 역사를 만들어 주고 복합적인 위기와 허위의 이데올로기, 언제 부서질 지 모르는 안정에 대한 위협, 모든 미국이라 이름 붙여진 부제의 공간들을 풍부하게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왜 이별을 초대해야 하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면 나의 눈/시선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녀는 왜 우리를 미래에서 돌려세우는가? 고개를 돌린 눈이 향하게 될, 전 시제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나의 분절된 기원과 마주하고, 조상들은 기원 없는 시작을 돌려줍니다. 걸음이 향하는 미래에는 이 기원 없는 시작으로 축조될 미국이 다가올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전후 기억들, 미국 이주의 역사, 표류하게 될 기원과의 대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녀의 마지막 의문문인 ‘무엇이 과거를 구성하는가’의 시제는 미래를 등진 우리의 시선이 목도하는 것과 미래에 등 돌린 그 과거들이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응시와의 만남들이 초 단위로 부딪히는 순간들인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가족들의 장면을 그녀는 통째로 흔들어 버리는데, 붉은 인디언의 운명처럼 그 가족에게 닥치지 않은 미래는 영화에서 결코 초대하지 않으며 무시무시한 긴장들로 남겨집니다. 예정된 운명이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 영화는 에비게일 차일드의 작품 중 가장 암시적 혹은 명확한 비극을 남기며 미래를 등진 우리의 자리를 상상적으로 발명해내고 있습니다.

이 “교외 삼부작”에서 에비게일 차일드는 미국의 일상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갈증들과 육식성의 감각들이 표출되는 미국의 표면을 일상의 동력과 대조시키며, 이 세 작품을 통해서 어쩌면 미국의 현재/과거/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주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무거운 일상을 버텨내고 다시 부서지는 위기들을 맞이하는 통합의 역사, 이것은 아마 그녀의 굉장히 파편적인 몽타쥬들과 아이러니한 대조를 또 이루는데- 를 구성합니다. ‘써프 앤 터프’에서 밤거리를 평범하게 질주하는 듯한 자동차에서 바라본 밤의 풍경들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밤이지만, 다른 이주에 대한 암시를 또 전조적으로 남겨 놓으며, 영화의 끝은 “ ‘끝’의 오래된 의미는 ‘장소’를 의미한다. 하나의 결말에서 다른 결말로의 이동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타이틀로 그녀의 계속적인 이주,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무거움을 들어올리는 장치가 없는 이주의 우산’으로서의 그녀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를 남기고 있습니다.

2008.9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프로그래머 김연정

Experimental film and video festival in Seoul, Programmer, YeonJeong Kim

#AbigailChild #실험영화 #에비게일차일드 #무거움을감아올리는장치없는이주의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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